‘돼지, 쥐, 심지어 곤충도 재판을 받았다?’ 중세 동물 재판 5가지

Nolan

중세 유럽에서 실제로 있었던 돼지 재판의 모습을 묘사한 삽화
1863년 로버트 체임버스의 『The Book of Days』에 수록된 삽화. 1386년 팔레즈 재판과는 다른 사건으로, 1457년 프랑스 라베니에서 실제 벌어진 재판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어린아이를 공격한 혐의로 기소된 어미 돼지는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고, 함께 기소된 새끼 돼지들은 무죄로 방면되었다. [삽화 이미지=Public Domain Image Archive]

중세 유럽에선 왜 동물들이 법정에 섰을까?

상상해 보라. 사람이 아니라 돼지나 쥐가 피고석에 앉아 심각하게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중세부터 근세까지 유럽 전역에서 실제로 동물들이 정식 재판을 받은 사례가 다수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최소 196건 이상이 문헌에 남아 있을 정도로 당시 사회에서는 이 일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돼지, 쥐, 곤충까지 법정에 선 기이한 사례들

가장 자주 법정에 오른 동물은 다름 아닌 돼지였다. 1386년 프랑스 팔레즈에서는 아기를 죽인 돼지가 사람 옷을 입고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을 주민들은 이 충격적인 처형을 보기 위해 좋은 옷을 차려입고 나와 구경했고, 심지어 이 장면은 교회 벽화에 남겨질 정도로 큰 화제가 됐다. 당시 사람들은 왜 이런 극단적인 방법까지 택했을까? 이는 중세 사회가 느낀 불안과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집단 심리적 반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6세기 프랑스 오툉에서는 쥐들이 곡식을 훔친 혐의로 기소되었다. 놀랍게도 이때 쥐들의 변호인이었던 바르텔레미 샤세네는 쥐가 출두하지 못한 이유로 “법정으로 가는 길목에서 고양이들이 위협하고 있다”는 기발한 논리로 쥐들의 무죄를 이끌어냈다.

곤충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랑스 생줄리앙의 포도밭을 망친 바구미는 교회법정에서 “해충도 신의 창조물이므로 생존권이 있다”는 변호인의 주장 덕분에 별도의 땅을 제공받는 타협안을 제안받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은 당시의 윤리적 사고가 인간 중심적으로 형성됐으며,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엄격하게 유지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이한 사례들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1906년 에드워드 페이슨 에반스가 저술한 《동물의 형사재판과 사형》은 200건이 넘는 사건들을 정리하고, 실제 재판 기록과 판결문, 심지어 교수형 집행인의 비용 청구서까지 수록해 역사적 사실로서의 신빙성을 높였다.

한편, 동물 재판의 전통은 중세 이후에도 이어졌다. 19세기 영국에서는 빌 번스라는 남성이 자신의 소를 학대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는 동물 학대와 관련된 영국 최초의 재판 사례로 기록된다. 이 사건은 동물 권리에 대한 근대적 논의가 시작되는 상징적 계기가 되었으며, 동물 보호법 제정의 전환점이 되었다.

빌 번스 재판 당시의 법정 삽화. 동물 학대 혐의로 소유주가 기소된 영국 최초의 사례
빌 번스 재판 당시의 법정 삽화. 동물 학대 혐의로 소유주가 기소된 영국 최초의 사례로 이후 동물보호법 제정의 계기가 되었다.[삽화 이미지=Wikimedia Commons]

중세 동물 재판을 통해 보는 현대의 법적, 윤리적 질문들

중세 유럽 사회가 동물을 법정에 세운 이유는 명확하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과 동물 간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믿었고, 이 질서가 깨졌을 때 사회적 혼란을 해소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의도로 동물에게 인간과 똑같이 죄를 물었다. 자연재해나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면 종교적 의식이나 법정 절차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현대 법체계에서는 동물이 법적 주체로 인정받지는 않지만, 동물권 개념이 떠오르며 생명체로서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그렇다면 중세의 동물 재판은 단순한 미신이나 기이한 사건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법과 윤리에 대한 인식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놓칠 수 있는 중요한 질문들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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